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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균형이 깨진 시스템, 지각게임의 제안자

(월간 퍼블릭아트 2021-8월호) 글 허대찬(앨리스온 편집장)

 

 

  가벽으로 구획된 직사각형의 공간 중앙 벽면에 황홀한 듯 힘겨운 듯 무아지경의 남성 상반신이 상영되고 있다. 이 남성은 음악이 재생되는 무선 이어폰을 착용하고 홀린 듯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는 중이다. 연기가 채워져 몽환적인 스크린 앞 공간에선 많은 사람이 남성처럼 EDM사운드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춘다. 어느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씩, 마치 배터리가 다 한듯 그 자리에 정지한다. 그 숫자는 늘어나다가 어느새 현장을 이탈한다. 주위 사람들은 이에 어리둥절해하며 뻘쭘하게 함께 자리를 떠나거나 상황을 파악하려 동행인과 수군거린다. 

 

  작가 박관우와의 첫 접저은 이 퍼포먼스 공간과 영상 그리고 이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어우러진 <안드로이드는 춤추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가?> (2019) 였다. 황홀한 듯 완전히 몰입해 춤을 추는 남성의 영상이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고 음악이 공간을 채우며 외형상 인간과 구분이 불가능한 안드로이드 역할을 부여받은 퍼포머가 자연스럽게 공간에 합류해 마음껏 춤을 즐기는 공간임을 표방하곤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그렇게 이끌린 관람자는 그 분위기에 녹아 춤에 합류했다가 이윽고 하나둘 자신이 기계임을 드러내듯 정지하는 퍼포머를 보고 흠칫 분위기에서 이탈한다. 이 시공간적 격리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상황과 멈춘 퍼포머의 존재에 대한 의문, 현재 상황과 관계에의 질문 그리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나에 대한 물음에 이르게 한다. 그들의 속내를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마주한적 있는 유행어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박관우는 ‘나’에 대한 탐색에 동기부여를 하고 이를 위한 지속적 반복을 제안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지점은 의문을 던지고 반복하는 주체인 인간의 자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외적, 내적 지각에 대한 문제다. 그에게 ‘세계’는 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향과 틀을 제공하기 위한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 여전히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미지다. 그는 우리가 대하는 세계는 단지 현재의 나의 기준점으로 닿을 수 있는 영역까지, 즉 일종의 저해상도 렌더링(rendering)이라 말한다. 그렇게 구성한 세계는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는 개별적인 소통의 불안정함으로부터 주변 환경으로의 피해까지 전방위적인 삐걱거림으로 수렴한다. ‘나’의 문제는 곧 ‘세계’의 문제와 연결된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파편적으로 편향되는 네트워크에서의 우리, 생태계의 가해자로서의 우리, 환경과 기후변화로 피해받는 우리 등 오늘의 많은 문제와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표출하기 위해 그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은 질문에 닿기 위한 접근 인터페이스로서의 작품이다. 그의 작업은 언뜻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듯 보이는 순환 구조를 가진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위장된 높은 위치 에너지를 가진 불안정한 상태의 조성이다. 결국은 끝에 닿고 가라앉거나 붕괴할 상황에 대한 예견, 그 에견을 위한 균열지점 인식, 결과에 대한 의미 탐색, 이 일련의 행위의 주체인 ‘나’에 대한 긍정과 자각, 즉 작품을 인식과 전개의 틀이자 컨트롤러 삼아 플레이 경험을 진행하는 것은 그가 제안한 지각 및 인식 게임이다. 

 

  박관우는 이러한 게임을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구분했다. ‘자/타의 문제’, ‘이해를 넘어선 차원’ 그리고 ‘흐린 경계선’이다. 우선 <내일>(2014)과 <타인>(2018),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줘 1,2> (2019)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순환 구조를 통해 나와 타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내일>에선 거울 모양 스크린 앞에 서면 24시간 전 그 장소의 모습이 재생되고, <타인>은 양쪽으로 위치한 잠망경 형태의 구조물에서 한쪽 접안부를 보면 관람자의 뒤통수가 보여진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줘 2>는 평행봉 양편에 선 Head Mounted Display (이하 HMD)를 착용한 퍼포머가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상황 구조를 가진다. 각각의 HMD 전면에는 180도 규격의 VR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카메라는 상대방의 HMD에 상황을 중계한다. 즉 양측 퍼포머는 상대방의 시야를 교차 소유하는 것이다. 양측은 반대편의 시야를 공유하며 점차 가까워지고 종막에는 각자의 촉각을 토해 서로를 인식하며 시각적 괴리를 해소한다. 이들 작품은 상대방의 시야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구조를 가졌다. 작품 전반에 내가 바라보는 행위에 기대하는 시야가 아닌 시공간적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가 맞이하는 것은 나의 시각, 지각, 이해에 관한 질문이다. 작품 모두에 시각적 시퀀스의 반복이 발생하고, 이 반복은 균열을 깨닫거나 구조적 한계 또는 반대항에 접촉하며 끝에 닿는다. 

 

  ‘불타는 유토피아’라는 미술 비평가 안진국의 저서 제목은 오늘의 세계를 표상한다. 우리의 시선이 닿는 자원과 이해를 통해 자아낸 세상,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과 이상향은 실제 세상에 대한 이해의 괴리에 의해, 우리의 손에서 탄생한 새로운 자연인 ‘디지털-네트워크’가 우리 손을 떠나 획득한 자동성에 의해 불타는 중이다. 작금의 사회는 파편화된 세대와 집단 사이의 충돌로 뜨겁다. 지구 환경은 그간 우리의 생태적 관점 몰이해로 인한 결과로 물리적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박관우의 시각은 여기에서 유효할 수 있는 행위이고 질문이다. 그의 게임에 접속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괴리의 상황 속에서 지각-인식-인지-질문의 반복 수행을 통해 우리는 무지했더나 무감각했으며 오독했던 영역에 대한 타래를 자아내고 그 답을 또한 반복해서 짚어낼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재귀적 과정은 마냥 모호하고 괴롭지는 않다. 그가 의도한 균열은 마치 2000년대의 어드벤처 게임이 그러했듯, 근래 유행하는 방탈출 게임이 그러하듯, 유희 안의 단서처럼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닛꽈 이해의 순간은 퀘스트 클리어의 순간처럼 하얗다. 관람객은 탐색과 인식 게임에 홀연히 이끌려 적극적으로 작품에 이입하고 그리하여 닿는 것은 발견의 연속이다. 플레이어로서의 관람객은 작가가 배치한 공백과 어긋남을 하나하나 찾아내 메워가며 지각적 충족감과 인지적 성취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계의 균열과 몰이해를 좁힐 수 있는 관점에 대한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는 작가가 설정한 전술적 승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가 설계한 시스템에서 관람객은 표피의 틈새를 자신의 ‘질문-답변’을 통해 연결하고 작가가 바라보는 내부의 지향점으로 향한다. 이 정서적 추론 게임은 즐겁게 당하는 승리가 될 수 있다. 작가의 문제 제기는 당대의 현실과 닿아있고 이에 접속하기 위한 인터페이스는 세련됐다. 작품의 구조와 틈새를 인식하면 작품은 이내 그 시스템을 플레이하기 위한 컨트롤러가 되며, 관람자는 이 균형이 깨진 균형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지각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몰입한다. 그리고 각자의 성취에 만족하며 존재와 세계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를 내부에 간직한다.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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