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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잡고"

<박관우 : 늑대와 함께 춤을> 전시에 관하여

장진택 (독립기획자)

 

 

1. 경험

  "꽤나 급작스레 당신은 공간으로 도착했겠죠. 전체가 쉬이 가늠되지 않는 어둑한 공간에서 당신은 잠깐이나마 당신의 감각을 적응시킬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음악이 들리고 자욱한 안개가 공간을 머금을 때, 그제야 당신을 발걸음을 옮길 수 있지 않았나요. 이윽고 푸르른 풀밭에서 당신은 마주쳤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누군가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닫힌 상황 속에서 당신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 이제 그 공간은 당신이 들어섰던 처음의 공간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공간은 이제 더는 무위(無位)의 빈 곳으로서 남아있지 못한 채, 당신의 의지나 계획 또는 예상과는 무관하게도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어떤 공간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당신이 아닌, 당신들에게 허락 혹은 강요되었을지도 모를 그 시공 속에서 당신들의 감각은 오로지 그 세계 안쪽의 질서만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조우하며 우리는 그 공통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삶의 관계를 맺었던 거여요.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은 오롯이 당신들에게만 허락 혹은 강요된 것이었고, 당신이 낯선 그 사람을 만났던 것처럼 그 사람도 낯선 당신을 만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며, 은은히 퍼지던 싱그러웠던 풀냄새까지도 가시면, 마침내 당신은 바깥으로 빠져나온 상태였겠죠. 그리고 비로소 이 글을 읽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익숙한 공생(symbiosis)의 영역에서 말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 공간에서의 기억을 곧 잊어버리게 되겠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이 했던 그 경험의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 경험은 앞으로 당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날 함께 삶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할 것입니다."       

 

2. 구조

   박관우는 작가이자 일종의 연출자로서 상황을 연출한다. 그가 연출하는 상황은 순전하다. 먼저 관객, 그리고 이 관객의 존재를 투사하는 동시에 작가의 설정을 최대한으로 실행해내는 한 명의 인터프리터(interpreter)로서 훈련한 수행자, 마지막으로 조향, 조명, 실내 공간 구성 등, 관객에게는 경험 수행자에게는 행위라는 범주 안에서 각기 다른 관계 맺음이 상호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을 구조하고, 마지막으로 이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바로 그가 연출하는 상황이다. 연출자가 마련하는 이 연극적 요소들은 관객과 퍼포머(performer)라는 서로 다른 주체를 서로 엮는 매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특징적인 것은 그 모든 요소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면서도, 그 반대개념인 자연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간 연출은 곧 공간 자체의 즉흥성(instant)을 극대화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 공간이 말 그대로 꾸며진 공간임을 상기하며, 만남이라는 계기를 통해 일으켜지는 공생의 시공이 판단을 유보하는 진공의 성격을 전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박관우는 그 가상의 풍경에 스스로 처한 관객과 수행자로 하여금 그토록 중립적인 만남의 순간 안에서 우리가 속해 있었던 바깥 세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찰나의 공생을 경험케 한다. 서로 다른 이들의 존재를 유일하게 구분 짓는 것은 음악이 유일한데, 작가는 관람 후에 이들이 들었던 청음의 플레이 리스트를 공개함으로 실제로는 각기 다른 음악에 맞추어 이들이 각 주체로서의 수행을 행하고 있었음을 알린다. 이로써 음악은 기타의 요소들과 함께 몰입의 과정을 조성하며 바깥과 안의 세계를 구분토록 하고, 퍼포머와 관객이 듣는 음악에 따라 각자의 수행을 전유하게 함으로써, 이들 모두는 생의 시공을 공유하는 와중에도 결국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엔 없는 운명임을 폭로하는 달콤씁쓸한 단서이기도 하다.          

 

3. 배경

   이처럼 박관우의 관심은 온통 인간을 향해 있다. 지금껏 그의 작업들 역시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미학적 혹은 철학적 변수의 실험을 포괄하고자 일으켜지고 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러한 인간의 면면에 점철하는 질문을 던지는 지를 작가는 명백하게 드러내 왔다. 더불어 박관우는 일반과 합리의 뜻을 의심하는 정도와 방법을 초월하려는 시도 또한 지속해왔다. 그러한 그의 작가적 태도는 오독의 위험성을 내포하는 대신, 적어도 기존의 그것과 작별한다는 것의 의미를 명백하게 드러내어 주기도 했다. 이상의 방법론을 통해 그는 인간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자아감 식별에 개입하려는 제도의 이면을 공평하게 드러낸다. 그 때문에 그의 작업으로부터 관객은 예기치 못한 자유를 만끽하거나, 작가는 스스로 불필요한 한계를 감내하게 하며, 전시의 관계자들은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정의를 규명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게 박관우의 제언은 새 시대의 인간상이 무엇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밝히려는 일 자체의 불가능함, 나아가 그것의 덧없음을 상기한다. 그 연장선에서 그의 전시 《늑대와 함께 춤을》(플랫폼엘, 2021)도 마찬가지로 그처럼 무척이나 명료한 명제를 일깨우려 한다. 상황은 단순할지언정, 관계는 복잡할 것이고, 상황은 관계를 구속하겠지만, 관계는 반드시 상황을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인간사의 진리를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각자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머피(Murphy)이거나 샐리(Sally)일 테고, 샐리이거나 줄리(Julie)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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