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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동시대 정체성의 규명을 위한

시대 연계형 작업의 실제

 

2021년 고양레지던시

국내 입주 작가 작품 개별 비평

장진택 (독립기획자)

  최근 디지털화의 급속한 경향 그리고 동시대 정체성 규정의 문제를 가로질러 두고, 지금의 세대는 분명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다만 안팎을 통틀어 파열하고 충돌하는 건, 언제나 그 상호 간의 관계성 설정에 관한 부분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그 양상들을 격리시킨 채 사고를 진전하려는 태도에 기인한다. 이로부터 무엇과 무엇 사이의 거리를 표상하는 차이의 개념이 곧이어 이 정립의 과정에서 소환된다. 말인즉슨, 선행 혹은 후행과 같은 일련의 순차를 끌어안으려는 인식이나 공간에 바탕하여 무엇이 더 중심에 있거나 멀리 주변에 있게 되는가를 가려내려는 우리의 관습적 본능이 어느새 또다시 작동한다는 거다. 결국, 디지털화라고 하는 변화가 이끄는 사회의 새로운 구조적 정립과 그러한 흐름이 새롭게 재편하려는 정체성의 식별 그리고 이 총체적인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주체와 그 의지 형성을 올바로 밝히지 않는다면, 도리어 더 큰 오해의 지점으로 모두를 몰아가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연유로 작금의 조건 아래에서 목격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의 재정립을 외치고 있는 이 현실이 실은 보다 다단하고 복잡한 상황임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그때가 언제였든 변화가 요구하는 그 시대만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자 했던 주체들의 노력은 끊임없이 있어 왔다는 사실일 테다. 따라서 축적된 경험으로부터 체제를 지지하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드시 당대를 선도하는 세대의 시대정신을 다시 세울 것을 제청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해체와 구축의 동시적 발생이 일으키는 오늘날 다중 구조의 혼란은 일정 부분 예견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상호 변화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처지라 해서, 그것이 그 재편의 수위나 범주를 서로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해 마련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로 인해 그 극명한 대립과 마찰은 스스로 발화할 지도 모를 제 연소를 막고 현상을 무리 없이 실현하기 위해 일종의 완충재로 일정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이의 시간과 공간을 형성할 수밖에는 없었는데, 아마도 박관우는 이른바 ‘사이 시공’이라 명명할 법한 이 특별한 범주 안에서 자신의 작업을 틔워내려는 듯하다. 작가는 신체의 수행성이 품고 있는 자기 인식의 감각을 주요한 미적 매체이자 주제로 삼아, 이를 통해 주체와 타자라는 상반된 관점을 아우르는 특정한 의식 단계에 진입하고자 한다. 여기서 인간 존재가 갖는 근원적인 자의식 또는 타의식에의 진입이란, 특히 그가 이 상호 개념의 식별 그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음을 방증키도 한다. 이를테면, ‘나’ 혹은 ‘너’는 ‘나’ 혹은 ‘너’를 식별할 수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할지언정, 그렇게 식별된 ‘나’ 혹은 ‘너’는 실제 ‘나’ 혹은 ‘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상과 같이 우리의 인식 체계 자체를 향한 작가의 원초적인 자기 의심은 자연스레 그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총체적으로 관망토록 하면서도, 어떻게든 각각의 시공을 유기적으로 이어낼 수밖에 없도록 이끈다. 박관우 작업의 주요한 목적이 합당한 정체성을 자기 발견하려는 인간의 정체성, 바로 그것을 조명하려는 데에 있는 것도 정체성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시대 상황 또는 그와 같은 상황을 촉발한 당대적 시대정신에 기대어 있다.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게 하는 이중적 거울 구조를 투사하거나 특수한 조건의 상황을 조성하여 타인의 지위를 자아의 그것과 뒤섞어버림으로써,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꽤나 직접적으로 제 정체성이라는 존재를 맞닥뜨리게 한다. 박관우 특유의 이러한 연출은 인식의 대상이기도 혹은 주체이기도 한 인간의 의식에 ‘너’와 ‘내’가 접속할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구조해 온 기존의 체계를 의도적으로 전복하거나 그 다시금 구성하려 한다. 나아가 그의 미적 실천은 인간의 물리적 신체나 형이상학적 내면의 범주를 초월하며 등장한 포스트-휴먼 개념 하에서의 대상과 주체로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하면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공을 점유하게 될 사회 구성 개체들 간 다종의 관계 구축을 시도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웹캠과 프로젝터를 활용해 피사 대상과 관람 주체의 지위를 흐린 <낯선>(2014)이나 마찬가지로 촬영과 상영의 방식을 빌려 일인칭과 삼인칭의 관점을 전치하는 <내일>(2014) 그리고 잠망경의 원리를 따라 능동과 피동의 주체를 혼재시키는 <타인>은 공통적으로 자아가 무엇을 바라보는 행위를 하는 가운데 종국에는 스스로가 응시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소위 재귀적 구조의 시각적 재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 일반 인식을 환기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기치 못하게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그의 작업은 바라보는 행위의 주체(자)인 자신이라는 자아와 바라보아지는 대상(타)으로서의 자신인 자아의 경계를 우리의 인식에서 급작스레 흐려버린다. 이들 작업이 그처럼 시각의 차원에서 자아를 타자로 직접 경험케 하거나 그로부터 타자가 바라보는 자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면,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줘> 연작(모두 2019)이나 <안드로이드는 춤추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가?>(2019)의 경우는 작가가 목표하는 정체성 규명의 의지에 디지털화의 과정을 내재하는 동시대성의 벡터를 겹쳐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두 작업에서 작가는 재귀적 자기 응시의 통로를 거쳐 도달하는 정체성 재정립의 준비 과정에 드론이나 VR과 같은 첨단의 기계 장치를 통해 자아낼 수 있는 감각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데, 이는 기술에 기반한 당대의 미디어 환경이 초래하는 인식 체계의 변화 현상을 당연한 사실로서 상정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박관우의 작업 세계를 이루는 마지막 축은 <인간의 대화 1>(2018)로 대변되는 또 하나의 유형일 것이다. 작가의 다른 작업들이 정체성을 논증함에 있어 연역의 방식을 따르는 반면, 본 작업은 귀납의 방식을 따라 개별의 사실(작업)들로부터 그를 넘어서는 확장적 결론을 도출한다. 그가 고용한 두 명의 배우가 수행하게 한 대화는 인공지능 챗봇 사이의 대화로부터 추출 및 생성한 대본에 기반하며, 그 대화 진행의 방식으로 인해 이때 행해지는 대화를 구성하는 문장 중 무엇이 인공지능의 것이며 또한 무엇이 인간의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도록 구성된다. 이는 작가가 인간이라는 단일종의 범주 안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그 전 과정에서 당장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지점을 중심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현재와 동기화한다는 점에서 박관우 작업의 여타 유형들과는 구별된다.       

 

  이처럼 박관우는 정체성의 개념을 좇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무언가 명확한 것을 발견하려 한다. 아니, 실은 무엇의 명확함을 발견하기보다 무엇이 불명확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에 나름의 명백한 자기 기준을 찾고자 함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과정은 작가가 의도하는바, 그에 따라 어떤 토대를 예비한다. 변화로 인한 사회 전반의 구조 전복과 체제 구축의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얽혀 일으켜지면서, 그 와중에 사회를 운용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이자 그 목적의 대상인 인간성 존립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전도되거나 희미해져 버렸다. 그토록 다양한 집단들 그리고 수많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포괄해야 하는 이 쉽지 않은 재정립의 상황 속에서, 작가는 주체적 세대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행사해야 할 의사결정권을 분명하게 행사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단절과 분열을 통해서가 아닌, 서로 다른 시대 혹은 세대 간 연계의 가능성을 항상 전제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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