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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체 뭘 믿고 거길 다녀오셨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눈까지 가리고 말이죠. 위험할수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나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누군 줄 알고요.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순순히 그곳에 다녀온 것은 무언가 믿을만 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것이 예술 작업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일까요? 아니면 박관우라는 사람을 믿었나요? 박관우가 누군지 는 모르지만 그가 예술가라는 것을 믿었나요? 혹은 소격동 한복판에 있는 갤러리에서 펼쳐지는 일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랬는지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당신의 믿음으로 이 작업이 작동될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이 쪽지를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믿음들에 대해 몇 글자 남겨 놓으려고 해요.

누군가 올 것이라는 믿음. 당신이 그 믿음을 포기했다면, 이 작업의 연쇄는 끊어졌을 것입니다. 단 한 명만 이라도 그 믿음의 벨트에서 튕겨나가면, 이 작업은 작동을 멈추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들의 말을 믿어주었고, 인내심을 가지고 누군가를 기다려주었기 때문에 이 작업은 일종의 형식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과 조우한 그 사람은 고용된 퍼포머였을까요? 혹은 당신과 같이 그냥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이었을까요? 놀랍게도 사실, 저도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작업을 작동시키기 위해 박관우가 고용한 사람이 참여자인 척 끼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반쯤은 이 프로젝트의 내부자인 저도 도통 알 수 없으니, 박관우라는 예술가는 그리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해서 정말로 믿지 않기는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믿어버리곤 하죠. 아니, 그냥 믿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발가벗은 임금님에게 굳이 나서서 진실을 말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믿음을 수행한다면, 곧 믿는 자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저 아래에서, 그러니까 볼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혹시 무엇을 발견했나요? 당신이 무엇을 (못) 보고 (못) 듣고 (못) 느꼈는지 궁금하네요. 이 작업이 당신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종의 사건을 만들긴 했지만, 당신을 그곳에 방치하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죠. 기다림의 시간이 당신에게 무언가 발견하도록 했을 수도 있겠네요.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그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물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간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그곳에서 무언가 봤다고, 느꼈다고 믿는다면 그게 정말로 맞습니다. 나아가 그것이 예 술 작업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아주 흥미롭고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 온 것이겠죠. 그런 믿음들이 계속 모여서 박관우가 더 유명해진다면, 나중에 이 경험이 자랑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것이 예술 작업이라 진짜로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 믿음 역시 틀렸습니다. 물론 생각보다 아주 세심하게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안전하지는 않았어요. 눈을 가린 당신이 그곳에서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힌다고 해도, 당신을 보호해줄 사람은 정말로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특정한 형식으로 매개되어 있지만, 매개되지 않은 바깥 세상과 똑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죠. 매개된 상황과 매개되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는 것 또한, 어떤 믿음일지도 모르겠네요. 무언가에 매개되지 않은 삶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나요? 그것으로 퍼포먼스의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퍼포먼스는 한 번도 시작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 오직 당신의 믿음 만이 이 작업을 작동시켰죠. 그렇다면 아직 무언가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 쪽지를 또 충실하게 여기까지 읽고 있다면 말이죠. 믿음은 그렇게 이어집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어도 믿음은 그리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일상의 연쇄가 지속되지요. 꿈과 각성의 변증법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무신론적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총체적인 믿음이 작동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계속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믿음 속에서 우리의 삶은 유지되고 있으니까요. 첫 문단에 믿음을 복수로 썼는데, 아무래도 잘못 쓴 것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도 믿음으로써 이 작업을 가능하도록 만들었으니 이미 책임을 나누고 있습니다. 또 누군가 에게 이야기를 전해주세요. 일종의 간증이 되겠네요. 복음을 전파하듯.. 나는 그곳에서 누군가 만났다고. 그렇게 믿었더니 이루어졌다고 말이죠. 믿음은 결코 깨지지 않았다고요.

2022년 가을, 박관우의 "졸다가 꾼 꿈"에 관하여 미술 평론가 권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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